다빈월드

오디오를 통한 재생음악 감상의 출발은 당연히 ‘음악소스기기’다. 음악을 일단 플레이시켜야 나중에 증폭(앰프)과 트랜스듀스(스피커)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음악소스기기 품질 최우선론’이 필연적으로 개입한다. ‘쓰레기가 들어오면 결국 쓰레기가 나간다’(garbage in, garbage out)는 다소 과격한 구호도 그래서 등장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음악소스기기만큼 격변을 겪고 있는 오디오 파트도 따로 없다. 지난 1993년 첫 월급으로 당시 70만원 상당의 인켈 컴포넌트 시스템을 샀던 필자의 경우만 해도, 음악소스기기는 제법 많이 바뀌어 왔다. LP플레이어(인켈. 그때는 MM과 MC카트리지가 따로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1차 CDP(야마하. 재생음이 그토록 깨끗하게 변한 게 믿기지가 않았다. 편하기도 무척 편했다), DVD플레이어(태광. 묵직한 음색이 듣기에 좋았다. 게다가 DVD도 볼 수 있다니!), 2차 CDP(에이프릴뮤직, 에소테릭. 역시 음악은 전용 CDP로 들어야 해! 그리고 비싸질수록 나오는 소리 역시 좋아졌다. 그리고 CDP에 DAC가 내장돼 있다는 사실을 이 무렵 처음 알았다).

그러다 2012년부터는 맥북(애플)이라는 신세계에 빠져 각종 DAC(네임, 누포스, 바쿤, 올닉, 에이프릴뮤직)과 매칭해 음악소스기기를 별도로 구성해오고 있다. 내외장 하드디스크에 담긴 음원을 재생 소프트웨어(오디르바나 플러스)를 통해 감상하는 한편, 유무선 인터넷을 통해 음원 스트리밍(Tidal)과 음원 플레이(Roon)를 동시에 즐기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부터는 좀더 ‘감성적이고 간편한 음악 감상’을 위해, 네트워크 플레이어 기능이 있는 블루레이 디스크 플레이어(이하 BDP)를 음악소스기기 항목에 추가했다.

이런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필자에게 이번 시청기인 파이오니아(Pioneer)의 ‘BDP-LX88’은 의미가 남달랐다. ‘UHD 블루레이 디스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디스크(CD / SACD / DVD / BD) 재생이 가능한데다, 요즘은 ‘원 플러스 원’ 취급을 받고 있는 네트워크 플레이 기능까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값비싼 하이엔드 브랜드의 CDP 엔진으로 즐겨 채용돼 그 실력을 입증했던 파이오니아의 오리지널 제품이 아닌가. 과연 파이오니아의 플래그십 BDP인 ‘LX88’은 어떤 화질과 음질을 보여줄 것인가, 가격이 반 정도 싼 동생 모델(BDP-LX58)과는 스펙상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리고 네트워크 플레이어로서 성능은 어느 정도일까.

"BDP-LX88의 설계 디자인"

파이오니아는 잘 알려진 대로 1938년 일본 도쿄에서 설립된 관록의 오디오 제작사다. 특히 전통적으로 디스크 플레이어 분야에서 강세를 보여왔다. 이미 1979년에 레이저 디스크(LD) 플레이어를 선보였고(상용모델은 1980년에 나온 ‘VP-1000’), CD가 개발된 1982년에는 곧바로 상용 CD플레이어를 재빨리 내놓았다. 1984년 세계 최초로 자동차용 CD플레이어와, LD 및 CD 겸용 플레이어를 출시한 제작사도 파이오니아다.

DVD 분야에서도 늘 앞서갔다. 1996년 처음 DVD 플레이어를 출시한 파이오니아는 이듬해인 1997년 세계 최초로 DVD-R 드라이브, 1999년에는 역시 세계 최초로 DVD 레코더를 출시했다. 국내 AV마니아들이 그 탄탄한 기본기와 뛰어난 만듦새로 열광했던 ‘DV-755Ai’가 지금도 현역기로 활용되고 있을 정도다. 이 모델은 2000년대 초반에 나온 제품인데도 이미 24비트/192kHz를 지원하는 DAC을 내장한, 그야말로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그러다 2014년 파이오니아의 가전부문은 온쿄(Onkyo)로 흡수됐다.

파이오니아에서는 지난 2008년부터 BDP를 생산해오고 있는데, 이번 시청기인 ‘BDP-LX88’을 파이오니아에서는 ‘플래그십 블루레이 3D 디스크 플레이어’로 명명했다. 북미 지역 출시모델 이름은 ‘BDP-88FD’(LX58은 BDP-85FD). 각 파트별로 설계디자인상 특징을 짚어봤다.

"비디오"

‘BDP-LX88’은 픽셀 드라이버 이미지 프로세서(Marvell Qdeo)와 4K 레퍼런스 컨버터로 구성된 파이오니아의 최신 비디오 엔진을 창착했다. 특히 4K 레퍼런스 컨버터를 통해 어떠한 디스크와 동일 네트워크상의 컨텐츠라도 4K UHD급 해상도(4K/60p/4:4:4/24비트)로 업스케일링해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참고로 HD는 약 100만 화소(해상도 1366 x 768), Full-HD는 약 200만 화소(해상도 1920 x 1080), 4K UHD는 약 800만 화소(해상도 3840 x 2160)를 보인다. 따라서 4K UHD는 Full-HD 해상도의 4배로 출력이 가능해 훨씬 선명하고 깨끗한 화면을 볼 수 있다.

"오디오"

레드북 CD, SACD, DVD, BD 등의 디스크는 물론 최대 24비트/192kHz의 AIFF, ALAC, FLAC, WAV 등 대부분의 고해상도 음원파일을 재생할 수 있다. 네트워크나 USB메모리에 담긴 DSD 음원(DSD 2.8MHz)도 플레이가 가능하다. BDP-LX58보다 전원부 용량을 키웠고, DAC 칩은 ‘LX58’에 썼던 ESS의 보급형 칩인 ES9011 대신 최상위 칩인 ES9018을 채널당 4개씩 동원했다. 이 ES9018 칩은 필자 자택에서 쓰고있는 비슷한 가격대의 경쟁모델 BDP에도 똑같이 투입됐다. 한편 모든 비디오 관련 회로를 차단, 아날로그 오디오 재생에 올인케 하는 ‘다이렉트 기능 회로’(Direct Function Circuit)를 마련해 영상없는 음악 감상시 음질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한 점도 눈길을 끈다. 아날로그 아웃은 XLR(밸런스)과 RCA(언밸런스)를 각각 1조씩 마련했다. 

"네트워크"

DLNA 기능을 지원해 동일 네트워크에 있는 스마트폰, 태블릿PC, 노트북, NAS 등으로부터 컨텐츠를 스트리밍할 수 있다. 전면과 후면에 마련된 USB 포트를 통해서 USB메모리나 외장하드에 담긴 음원을 재생할 수 있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옵션인 와이파이 어댑터를 통해 무선 연결도 가능하다. IOS 및 안드로이드 컨트롤 앱은 ‘iControlAV5’인데, 이를 통해 리모트 컨트롤은 물론 유튜브를 앱상에서 직접 플레이(‘Send to TV’)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쟁모델에서 제공되는 타이달(Tidal)이나 넷플릭스(Netflix) 서비스 기능은 빠져있어 두고두고 아쉽다.

"섀시"

섀시 설계상 ‘LX58’과 가장 큰 차이점은 섹션간 상호간섭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원부, 디지털 프로세싱부, 아날로그 오디오 회로부를 3단 챔버로 각각 분리했다는 점. 하지만 2중 레이어 섀시 설계기술(3mm, 1.6mm 두께 강판을 2중으로 겹쳐 설계)을 통해 가장 문제가 되는 하단 섀시의 진동을 억제하고 있는 점은 두 모델 모두 똑같다. 트랜스포트 하단에 진동흡수 효과가 뛰어난 고무를 깔아 트랜스포트 자체의 진동문제도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여기에 트랜스포트 자체가 강한 철제 구조물로 덮여 있어, 트레이가 나왔다가 들어갈 때 매우 부드럽게 작동하며 소음도 거의 없다. 이 부분의 품질은 체감상 자택에서 쓰고 있는 경쟁모델보다 확실히 몇 수 위다.

다음은 ‘LX88’과 ‘LX58’의 스펙상 비교 특성표를 직접 만들어본 것이다. 비디오 회로부는 거의 동일하며, DAC 칩 등 주로 아날로그 오디오 회로부에서 차이가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이오니아에 따르면 전원부의 용량도 ‘BDP-LX88’에서 대폭 늘어났다고 한다.  

"셋업 및 시청"

셋업은 파이오니아 ‘BDP-LX88’을 120W 출력의 KT150 푸쉬풀 진공관 인티앰프(옥타브 V80)에 밸런스 인터케이블(체르노프)로 직결했다. ‘BDP-LX88’의 내장 DAC을 직접 테스트해본 것이다. 스피커는 소너스 파베르의 플로어스탠딩 ‘Olympica III’, TV는 삼성의 75인치짜리 LED UHD TV(모델명 UN75JU7000)를 동원했다. 

The Dark Knight Rises
The Dark Knight Rises

초반 배트맨과 베인의 만남 및 격투신과 중후반 집단 격투신 및 추격신을 집중 시청했다. 무엇보다 근육질의 두 남자가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 그 둔중한 오디오적 타격감이 제법이다. ‘Olympica III’라는 오디오 전용 스피커가 AV용으로도 화려하게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역시 영상디스크 플레이어의 강자답다. 색감 자체는 자택에서 쓰고 있는 BDP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좀더 세밀히 관찰을 하면 ‘BDP-LX88’의 색감이 좀더 매끄럽고 순한 특성을 보인다. 색감이 진하거나 뚜렷하기보다는 노이즈가 거칠게 표현되지 않도록 스무드하면서도 매끄럽게 튜닝을 한 것 같다. 전체적으로 영화필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파이오니아가 의도적으로 디지털 느낌을 배제하고 대신 아날로그적인 색감을 보여주기 위해 튜닝한 결과일 것이다.

Diana Krall - All or Nothing At All

The Very Best of Diana Krall

베이스 저음의 양감이 적당하게 재현된다. 이 곡을 웨이버사의 DAC(W DAC3)에 물려서도 들어봤는데, 무엇보다 저음이 강력하게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재생의 적극성도 조금 더 관찰된다. 어쨌든 ‘BDP-LX88’의 내장 DAC 성능은 하이엔드 DAC이 선사하는 칼같은 해상력은 아니지만 노이즈 관리는 무척 잘 돼 있다는 인상이다. 보컬은 약간 앞으로 포워딩하고 있다. 색채감이 아주 진한 사운드는 아니지만, 피아노 터치감이 맑고 경쾌해 기분까지 좋아진다.

Miles Davis - So What

Kind of Blue CD

무대가 넓게 펼쳐진다. 드럼은 완전 오른쪽에, 베이스는 왼쪽 가운데 위치한 모습이 잘 그려진다. 왼쪽 앞에 있는 색소폰의 양감 역시 만족스럽다. 가운데 트럼펫의 사운드도 잘 뻗는다. 물론 ‘Olympica III’ 이라는 스피커의 기본 체력이 일단 좋은데다, 옥타브 인티앰프에 장착된 KT150 진공관의 물성 자체가 역대급 빔관일 정도로 탁월한 덕이 클 것이다. 하지만 굳이 별도 하이엔드 DAC가 필요할까 싶을 정도의 완성도 있는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DAC을 내장한 단품 플레이어로서 어디 하나 손색이 없다.

George Solti - Mahler Symphony No.2

Chicago Symphony Orchestra

투티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맛이 좋다. 팀파니의 타격감도 괜찮다. 무대도 아래쪽으로 내려가 있어 전체적으로 크게 불만이 없다. 하지만 평상시 하이엔드 DAC으로 들었을 때와 굳이 비교하자면, 금관은 약간 경직됐고 오케스트라의 바디감이 아무래도 약하다. 그럼에도 금관의 광채와 현악군의 선예한 맛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대편성곡에서 확실히 느낀 것은 이번 시스템의 노이즈가 극도로 억제돼 있다는 것. 음에 윤기와 찰기가 좀더 있었으면 바라게 되지만, 스케일과 윤곽은 나무랄 데 없이 잘 그려내주고 있다.

Brian Bromberg - Come Together

Wood

전체적으로 연주의 다채로운 뉘앙스를 잘 전해주고 있다. ‘BDP-LX88’의 오디오 성능은 확실히 중저역을 도드라지게 하는 쪽으로 튜닝이 돼 있는 것 같다. 특히 이 곡처럼 베이스의 둔중한 저역 타격감을 즐기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최상의 조합이다. 개인의 취향과 듣기에 따라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양감이 풍부한 편. 타이트한 저역에 익숙한 애호가들한테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블루레이 디스크 플레이어를 인티앰프에 직결해서 지금의 사운드 이상을 원한다면 순진한 어린애 같은 과욕일 것이다.

"총평"

‘BDP-LX88’은 디스크 플레이어와 관련된 파이오니아의 전통과 기술 노하우가 집약된, 모범생 같은 제품이라 할 만하다. 특히 비디오 재생에 관해서는 자택에서 쓰고 있는 경쟁모델 BDP보다 약간 우수했으며, 오디오 품질은 대동소이했다. 두 모델 모두 일단 동일한 DAC 칩(ES9018)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BDP-LX88’쪽이 중저역을 조금 더 도드라지게 튜닝했다는 인상이다. 물론 ‘BDP-LX88’을 디스크 트랜스포트로만 쓰고, 외장 DAC을 활용해 오디오 품질을 업그레이드할 수도 있지만, 단품 플레이어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재생 능력을 보여준다. 역시 ‘파이오니아’라는 관록은 어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by 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