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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Notice

[리뷰] rega 안내서 8편 - 아날로그의 멋과 맛, Planar 3 Turntable (하이파이클럽, 2017년 11월)

[하이파이클럽] rega 2022-04-12 조회수 268


“아날로그의 멋”


시간은 한 시를 넘어 두시를 향해 초침이 또각또각 전진하고 있었다. 도심이지만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길가에 한 줄기 불빛이 지하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나는 길을 건너 그 건물 아래로 미끄러지듯 흘러들어갔다. 지금은 여느 술집에서 보기 힘든 커다란 패브릭 소파가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물끄러미 등을 대고 늘어서 있었다. 마치 조금 전까지 왁자지껄 소리 내어 떠들던 단체 손님들이 빠져나간 듯 공간엔 낯선 향취가 복잡하게 섞여있다. 공간은 이전 공기의 질서를 조금씩 찾아 나서 분주히 제자리를 잡아나갔다. 갑자기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핑크 플로이드의 ‘Welcome to the machine’이 공기를 휘저었다. 오래된 LP, 아마도 예전에 EMI에서 발매된 빛바랜 재킷이 시간의 덧없음을 일러주려는 듯 ‘The Wall’을 누렇게 변색시켰다.



더 반가웠던 건 레가 턴테이블이다. 테크닉스를 싼 값에 후배에게 넘기고 마침 허전했던 찰나. 이름 모를 상점에서 턴테이블을 쇼윈도 너머 바라보며 언젠가는 구입하리라 마음먹었다. 게다가 새하얀 바디는 방금 목욕재개를 한 듯 말끔하면서 우아하고 심플했다. 어차피 원룸에서 조그만 시스템을 우겨넣고 음악을 듣는 처지에 레가는 아슬 아슬 랙 한 켠에 딱 맞는 사이즈였다. 이전에 토렌스, 가라드 등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간결함에서 오는 멋스러움이 그 때 나를 또 다른 아날로그의 길로 이끌었다.


벌써 2017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그저 상상만 하던 미래를 지나 온지도 한참 지났다. 턴테이블은 여전히 중력의 법칙 아래 단단히 바닥에 발을 딛고 LP를 돌린다. 사람들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세계를 지나 다시 아날로그로 회귀하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불편하고 번잡스러운 아날로그의 세계로 이끌었을까. 반듯한 사각 랙 안에 네임이나 사이러스를 차곡차곡 쌓아놓고 역시 궤짝같이 생긴 직각의 스피커 통, 그 안에 커다란 우퍼가 들썩일 때 음악은 비로소 음악처럼 들렸을 것이다. 깨끗하고 명징하지만 동시에 LP 로 듣는 날 것의 싱싱함, 일정 분량의 잡음이 마치 일부러 분위기를 돋우려 만든 영화 속 빛줄기처럼 현실감을 북돋운다. 깊고 진하며 활활 불타오르 듯 그 당시 나는 P3로 사이키델릭과 포크, 종종 하드밥과 현악 사중주를 즐겼다.




“Planar 3의 귀환”


다시 만난 레가는 마치 세월의 강을 한 번에 건너 뛴 듯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델명도 똑같이 Planar 3. 여전히 동일한 모델을 그대로 생산하고 있군...하는 찰나 톤암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레가의 여러 모델을 사용해보았으므로 한 눈에 차이점이 눈에 들어왔다. 결론은 당시 Planar 3와 다른, 개선된 신형 모델이다. 조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Planar 3로 최초 발매한 후 레가는 갑자기 RP-3로 모델명을 변경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다시 Planar 6를 비롯해 Planar 모델명을 다시 부활시켰다.



Planar 3 는 레가 턴테이블 역사를 관통하는 제품으로서 레가를 대표한다. 그 중심엔 RB3XX 계열 톤암이 있다. 레가 아날로그 라인업의 성공은 바로 이 RB3XX 톤암에 상당부분 빚지고 있다. 레가 역사에서 무려 35년 이상 롱런하면서 레가라는 브랜드를 맨 선두에서 이끌었다. 오직 턴테이블만 만들던 시절 레가는 RB300이 장착된 레가 Planar 3 턴테이블 완제품은 물론 RB300 톤암 판매로 유명세를 얻었다. 어찌 보면 다른 모든 라인업을 구축하는 데 있어 Planar 3는 든든한 산파 역할을 했다.


 
다시 발매된 Planar 3엔 RB330이라는 신형 톤암이 설치되어 있다. 시대의 변화와 프로그래밍의 발전으로 최신 3D CAD 와 CAM을 사용해 정교하게 디자인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새롭게 설계된 베어링 하우징을 탑재하고 있으며 새로운 톤암 튜브는 기존 톤암에 비해 진동에 대해 훨씬 더 탁월한 성능을 보장한다. 더불어 베어링 어셈블리 또한 더욱 정밀하게 다듬어 무척 안정적이며 정교한 트래킹 능력을 획득하고 있다.



RB330이 가장 빛나는 점은 이 정도 가격대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다이내믹 밸런스 방식이라는 점이다. 스태틱 밸런스에 비해 레코드의 표면 주행 중 일어나는 침압 변동에 대해 유동적이며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 음질적으로 장점이 많다. 무게 추는 정교하게 가공된 100그램짜리를 적용하고 있다. 다만 여전히 톤암 높이 조정은 한계가 있어 레가 외에 직경이 높은 카트리지를 사용하려면 별도의 높이 조절 어댑터를 구입해 적용해야한다.



플린스는 하이 글로스 아크릴 마감이다. P6가 무광이었던 것과 달리 Planar 3는 윤기가 흐르는 마감으로 좀 더 럭셔리한 인상을 준다. 레가에서는 화이트, 블랙, 레드 세가지 플린스 버전을 생산하고 있으며 기존 RP3보다 더 단단하면서 여러 부분에서 좀 더 향상된 공진 특성을 가진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스타트/스탑 버튼의 위치인데 신형의 경우 정면에서  봤을 때 좌측 바닥에 위치해있다.



플래터는 여타 레가 턴테이블처럼 서브 플래터와 외부 플래터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 서브 플래터는 이 모델부터 금속이 아니라 플라스틱 소재 플래터로 제공된다. 하지만 무척 고강도로서 기존보다 정밀도를 향상시킨 파트다. 외부 플래터 역시 새로운 옵티화이트 광택을 낸 12mm 유리 재질로 상위 모델과 달리 단일 소재를 활용하고 있다. LP를 올렸을 때 은은하게 반짝이며 회전하는 모습이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매트는 섬유 재질로 흔히 볼 수 있는 매트인데 링맷 같은 매트로 바꾸면 음질적으로 좀 더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모터 또한 개선된 24V 모터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TT-PSU 같은 독립형 전원부를 붙여 사용할 수도 있으나 별도 구매해야하는 옵션이다. 후면에 전원 연결단자를 사용해 연결하면 33 1/3과 45RPM 에 대응하며 좀 더 정교한 속도 안정성을 얻을 수 있다. 하단엔 여전히 레가의 고무발이 보이며 3점지지 구조로 단아한 멋을 풍긴다.




“달콤하고 풍성한 아날로그의 맛”



Mischa Maisky - Schubert Songs without words
Daria Hovora


피아노 타건이 크고 둥글게 맺힌다. 마치 우유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듯 식감이 풍부해지는 느낌이다. 날 서고 딱딱하고 중저가 디지털 장비의 소리에서 넘어오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음악을 힘껏 껴안게 한다. 최근 아날로그포닉에서 출시한 미샤 마이스키의 슈베르트 ‘무언가’를 들어보면 호보라의 피아노 타건이 리스닝 룸을 잔잔하게 적신다. 서릿발, 칼바람 같은 마음도 봄 햇살에 녹아내리듯 달콤하고 따사롭다.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는 특히 중역대가 든든하며 두께가 있어 묵직한 울림을 완만하고 풍부하게 살려준다. 정교하고 분석적인 독일, 미국 아날로그의 정반대편에 서있는 브리티시 아날로그의 맛이다.

John Mclaughlin, Al Di Meola, Paco De Lucia - Aspen
Passion Grace & Fire

너무 무르고 해상도가 결여되어 무덤덤한 소리로 일관했다면 나는 레가를 리뷰용으로만 사용하고 박스 속에 고이 처박아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해외에서 배달되어오는 신보를 레가로 들었다. 최근 ‘Audio Fidelity’에서 고음질 LP로 리이슈된 기타 명인 세 명의 연주를 들어보면 중역대의 풍부한 배음과 고음에서 달콤한 음색이 어울려 무척 몽롱하면서도 기분 좋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Aspan’같은 곡에서 알 디 메올라는 좌측, 파코 데 루치아는 우측, 그리고 존 맥러플린은 무대 중앙에서 연주하는 모습이 꽤 명료하게 표현된다.

Jeff Beck - Come Dancing
Wired

레가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어떤 특정 장르, 특정 녹음만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쿠스틱 악기 위주의 클래식이나 재즈는 물론이며 일렉트릭 음악에서도 노련하게 대응한다. 요컨대 장르 간 편견 없이 넓은 포용력과 관용성을 갖추었다. 마침 어젯밤 맥주 한잔과 함께 즐겼던 제프백의 [Wired] 앨범 중 대표곡 ‘Come dancing’같은 록음악에도 마치 1976년 당시 런던 Air 스튜디오 녹음의 향취와 질감이 그대로 살아난다. 두툼하고 탄력적인 윌버 바스콤의 일렉 베이스와 제프백의 박진감 넘치는 기타, 드럼은 단정하고 힘차게 전진한다.

New Trolls - Adagio
Concerto Grosso per

나는 메인 턴테이블로 독일 트랜스로터 턴테이블을 사용한다. 대게 녹음 자체가 뛰어난 음악들 위주로 듣게 된다. 왜냐하면 워낙 해상도가 높고 예민하기 때문에 녹음이 좋지 않은 경우 귀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레가 같은 경우 Elys 2 카트리지의 영향도 있으나 적당한 해상력에 모난 부분 없이 담백한 소릿결로 모든 녹음을 감싸 안아준다. 지난 레코드페어에서 구입한 뉴트롤스의 콘체르토 그로소 앨범 중 ‘Adagio’에서 묵직한 드럼비트 위로 거세게 몰아붙이는 현악 스트링, 그 사이를 강력하게 치고 올라오는 일렉트릭 기타가 스스럼없이 가슴을 무장 해제시킨다.



“총평”





레가 Planar를 테스트하기 위해 사용한 카트리지는 레가 Exact 와 Elys 2다. 하이엔드 오디오 유저에게는 턴테이블과 카트리지 모두를 합한 가격이 케이블 하나 가격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즐길 수 있는 음악과 그 감동의 무게가 과연 어느 정도일지를 가늠해보자. 결코 적지 않은 감동과 가치가 이 단출한 아날로그 시스템 안에 담겨있다. 과거 마란츠 인티앰프와 JBL 그리고 레가 Planar 3 로 듣던 음악은 그대로다. 그리고 Planar 3는 한층 더 진화한 모습으로 십년 이상을 가로 질러 나의 오디오 랙 위에 놓여있다. 캐리 300B 인티앰프, 토템 모델 1, 제프롤랜드와 다인 C4 등 시스템은 바뀌었어도 레가는 여전히 레가임을 확인했다. 레가가 나에게 술 한 잔 사준 적도 없지만 나는 이 가격대 단 하나의 턴테이블로서 레가를 추천한다. Planar 3는 아날로그의 멋과 맛의 세계로 안내하는 지름길이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