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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Notice

[리뷰] rega 안내서 11편 - 아날로그행 편도 티켓, Planar 1 Turntable (하이파이클럽, 2018년 1월)

[하이파이클럽] rega 2022-04-12 조회수 316





"아날로그의 비밀"


아날로그 LP를 그저 매질에 따른 포맷의 한 종류로 이해하는 것은 오류다. 오늘날 디지털에 익숙한 대다수 사람들은 아날로그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오류를 낳는다. CD와 음원으로 간단히 즐기는 것보다 때로는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카트리지 바늘이 소릿골을 읽어나가는 것을 추억과 회상 정도로 받아들인다. 신보를 LP로 듣는 것을 단지 힙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며 즐긴다. 하지만 아날로그 LP는 단지 매질의 차이를 넘어 레코딩과 음악산업의 총체로서 디지털의 그것과 구분되어야 한다.


내가 최근 몇 년간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는 미국 아날로그 프로덕션즈와 뮤직 매터스 등이 발매한 LP를 다수 컬렉션한 일이다. 블루노트 75주년 LP가 CD를 마스터로 삼아 LP라는 매질에 그저 아날로그 사운드를 흉내 낸 것이라면 뮤직 매터스 등은 당시 빼어난 제작과정과 마스터 커팅으로 블루노트 사운드의 원형을 현대에 환생시켰다. 아날로그 포맷을 감안한 녹음과 믹싱, 마스터링은 디지털 포맷으로 제작, 소비된다는 가정 하에 만든 그것과 완전히 구분된다.





이미 24비트 MQS 고해상도 음원을 모두 가지고 있음에도 값비싼 저들의 LP를 구입한 것은 아날로그 포맷을 가정하고 녹음된 릴 마스터테잎을 마스터로 사용해 마스터 커팅, 제작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의 들숨과 날숨이 모두 그 안에 일관적인 호흡을 가지고 생명을 이어가게 해준다. 때로 오리지널 모노 녹음은 억지로 스테레오 음원으로 변환되어 소비되고 있다. 오리지널 모노 녹음을 들었을 때 그 동안 얼마나 오리지널 마스터에서 멀어지고 변형, 왜곡된 음악을 듣고 있었는지 깨닫기도 한다. 인류가 수십 년 동안 이룩한 음악의 바벨탑은 그렇게 훼손되어 소비되고 있다. 단지 24비트가 문제가 아니라 오리지널 마스터의 형태를 되새기는 일부터 시작해야 옳다. 과거 아날로그 시대 명연주 명음반을 아날로그 LP로 즐기는 당위성은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레가 Planar 1"


나에게 아날로그 LP를 들어야겠다는 결정적 힌트를 준 것은 가요 LP들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레가가 20년 이상 LP를 듣게 만드는 대장정을 충실히 도왔다. 과거 원래 LP로만 발매되었던 가요가 CD의 출현과 함께 다시 재발매되는 광경이 많았다.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CD로 듣던 동아기획, 지구 레코드 등의 가요 CD는 구하기 힘들었던 가요에 대한 즐거움을 손쉽게 안겨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구해서 들어본 LP사운드는 CD가 얼마나 오리지널 사운드를 훼손시켰는지 뚜렷하게 증명했다. 여타 음악들도 마찬가지지만 모노가 스테레오로 바뀌는 것은 기본이고 믹싱 자체가 틀려 악기 위치가 뒤바뀌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는 음질이 좋다 나쁘다의 아젠다 이전에 본래 음악의 심각한 변형들이었고 해당 음악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낳는 원흉이 되기도 했다.





당시 들었던 레가 P1, P2, P3 등의 턴테이블은 마치 그림 복원가들이 오리지널 화가의 붓질과 물감의 두께까지 계산하듯 CD가 왜곡한 오리지널 레코딩을 되찾게 해주었다. 다시 만난 레가 P1, 정확히는 플래너(Planar) 1의 모습은 당시와 다르지 않아보였다. 리뷰용으로 대여 받은 제품은 심지어 가장 어여쁜 화이트 마감. 마치 새하얀 눈 위에 동그란 플래터를 사뿐히 던져놓은 듯한 이미지가 눈에 가득 들왔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구형 P1에서 여러 부분이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우선 바디부터 눈에 띈다. 무광이었던 구형과 달리 신형 플래너 1은 피아노 마감으로 은은하게 반짝여 한층 예쁘고 고급스러운 뉘앙스를 풍긴다. 레가의 최하위 기기, 입문용 턴테이블이지만 디자인은 거의 동일해서 반듯하게 깎은 플래터 위에 플래터 그리고 톤암, 그것이 처음이자 끝이다. 대게 저가형으로 출시되는 최근 타사 턴테이블이 USB 출력이라든지 자동 기능 그리고 억지스럽게 꾸민 디자인 등으로 어필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레가는 엔트리 모델에서도 그저 정확히 잘 돌아가고 세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오롯이 구현하고 있다. 모두 최고의 음질을 위한 결정이다.





우선 베이스가 되는 플린스는 열경화성 수지로 반짝이는 광택이 흐르며 온/오프 스위치도 구형과 달리 베이스 좌측 바닥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단에 어떤 스위치 등 조작부가 보이지 않는 미니멀 디자인의 진수. 플린스 색상은 블랙과 화이트 두 종류로 출시되었다. 구형에 비해 발전한 것은 플래터와 베어링에서도 발견된다. 일단 플래터는 레가가 신형 라인업을 출시하면 새롭게 개발한 것이다. 높이 23mm의 슬림한 두께에 보편적인 수지(resin)가 아니라 페놀 수지(phenolic)을 사용해 기존보다 높은 플라이휠 효과를 얻었다. 당연히 더 안정적인 속도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외부 플래터를 걷어내면 그 안에 작은 서브 플래터가 모습을 드러내며 이것이 모터와 벨트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다. 특히 베어링은 플래터의 안정적이며 정교한 회전에 영향을 주는데 플래너 1에 적용된 베어링은 레가 특허 제품으로 구형을 버리고 새롭게 설계한 황동 베어링을 탑재하고 있다. 턴테이블 구동시 베어링에서 발생하는 진동 에너지의 전환 등을 최소화한 특허 베어링이다. 서브 플래터를 회전시키는 모터는 24볼트 싱크로너스 교류 모터다. 그리고 그 안에 PCB를 내장하고 있으며 회전시 노이즈를 최소로 줄인 정교한 알루미늄 소재 풀리를 장착하고 있다.





LP 그루브 위에서 직접적으로 카트리지 주행을 돕는 톤암은 RB110으로 레가의 엔트리 톤암이다. 역시 마찰이 적으면서 회전이 무척 자유로운 레가 특허 기술이 적용된 톤암이다. 핵심적인 것은 턴테이블 입문자들을 위한 엔트리 모델의 세팅에 대한 배려다. 다른 모델도 마찬가지로 레가는 거의 ‘Plug & Play’컨셉을 고수해 아날로그의 입문 장벽을 낮추었다. 특히 플래너1은 플래너 2와 함께 상급보다 세팅이 더 쉽다. 우선 새롭게 개발한 오토매틱 바이어스 시스템을 적용해 안티스케이팅 조절이 따로 필요 없다. 물론 여전히 VTA, 즉 톤암 높이 조정이 안되는 것은 아쉽지만 레가에 기본 장착되는 카본 카트리지면 문제없다.


게다가 이미 공장에서 정확히 장착되어 출시되기에 초심자가 가장 힘들어하는 카트리지 오버행/오프셋 조정도 건너 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침압이 남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 무게추 앞쪽으로 마련된 라인 앞으로는 조정이 불가능하다. 바로 이 지점이 카본 카트리지에 대한 적정 침압을 줄 수 있는 무게추 위치다. 그저 그 위치에 무게추를 놓고 LP를 돌리면 그만이다. 이것으로 레가 플래너 1을 세팅하는데 사용자가 할 일은 그저 턴테이블을 박스에서 꺼내 랙 위에 놓고 전원 어댑터와 인터케이블을 연결하는 것이 전부다. 단, 33 1/3 및 45RPM 전환은 완전 수동식으로 플래터를 걷어낸 후 벨트 위치를 바꾸어 주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솔직, 담백한 레가 사운드의 원형"


레가 플래너 1에 장착된 카본 카트리지에서 출발한 신호는 레가 Fono MM 포노앰프로 들어갔다. 포노앰프에서 증폭된 신호는 사이러스 8-2 DAC 겸 앰프로 흘러갔다. 어떤 게인, 임피던스, 커패시턴스 등 복잡한 문제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아주 간단한 올인원 앰프에 연결해도 그만이다. 테스트에 사용한 스피커는 토템 신형 스피커 시그니처 원을 선택했다. 스피커는 무척 상쾌한 음색에 핀포인트 포커싱과 입체적인 스테이징이 매력적이지만 레가의 온건하고 담백한 사운드가 이를 순화시켜주면서 중역대 디테일을 촘촘히 메워주었다.



Anne Bisson Trio - Four Seasons
Live at Bernie's

플래너 1과 카본 카트리지로 듣는 음악의 전체적인 밸런스와 피치는 여타 레가 제품과 마찬가지다. 전반적으로 무게 중심이 높지 않고 딱 중립적인 균형감을 갖는다. 예를 들어 앤 비송의 [Four Seasons] 앨범을 들어보면 중앙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컬이 맺히며 양 쪽으로 악기들이 보컬과 옹기종기 모여 연주하는 모습들이 생생하다. 녹음과 동시에 LP를 커팅해 만든 D2D 방식 LP로 녹음 현장의 소리를 가감 없이 솔직하게 뱉어낸다. 숨소리마저 그대로 느껴지는 아날로그 녹음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다.



Mischa Maisky - Schubert Songs without Words
Daria Hovora Piano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피아니스트 다리아 호보라가 함께 연주한 슈베르트의 ‘무언가’ LP를 들어보자. 아날로그포닉에서 고음질 LP로 발매된 본 작에서 느낄 수 있는 음색은 무척 명징하며 획이 크게 그려서 상당히 호쾌한 느낌으로 들린다. 음원에서는 단조롭게 느껴졌던 사운드가 생명을 얻어 만개하듯 단숨에 청각을 사로잡는다. 이는 배음 표현력의 상승 덕분이다. 엔트리급임에도 상급 레가 턴테이블과 성향 자체는 동일해서 첼로의 울림은 풍부하고 피아노는 담백한 울림을 길게 내뿜는다.



Eric Anderson - Blue River
Blue River

레가 턴테이블의 매력은 특히 팝이나 포크 음악들, 그것도 과거 1970년대 음악에서 그 빛깔이 매력적으로 드러난다. 에릭 앤더슨이 1970년대 발매했던 앨범 [Blue River]를 들어보면 보컬은 더 진심을 담아 호소력 짙게 들린다. 이는 대게 레가의 중역대 표현력에 빚지고 있다. 음원으로 들을 때보다 더 감성적인 부분을 건드리며 감정에 호소한다. 중역에 에너지가 다소 몰려있는 부분 덕분인데 그렇다 고해서 둔하고 빽빽하지는 않다. 더불어 기타 사운드에도 중역의 농밀한 느낌 덕분에 더 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John Coltrane - Blue Train
Blue Train

중역대 에너지가 많고 디테일이 뛰어나며 고역은 밝고 상쾌하다. 아주 미세한 질감 표현은 상급에 비해 떨어지지만 여전히 레가는 레가다. 특히 최근 자주 듣는 고음질 재즈 재발매 LP가 귀에 담백하게 감긴다. 예를 들어 존 콜트레인의 오리지널 모노 레코딩 [Blue Train]을 뮤직 매터스 재발매 LP로 들어보면 24비트 스테레오 믹싱 음원과 너무나 다른 종류의 감흥을 만들어낸다. 녹음 당시의 진하고 묵직하며 때론 거친 느낌들도 솔직하게 표현해준다. 마치 연기 자욱한 재즈 클럽의 열기 속으로 타임슬립하는 듯한 앰비언스다. 아날로그 녹음, 당대의 리얼리티가 주는 감흥은 시대를 관통하며 음악에 서사적 가치를 부여해 음악을 곱씹게 만든다. 표피적인 감상과 맛보기가 아니라 완전한 소화를 통한 음악적 포만감을 만끽할 수 있다.






"총평"


막강한 하이엔드 디지털 소스 기기를 운용하고 있는 오디오파일에게도 나는 감히 플래너 1을 권해주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갖혀 그 외부를 둘러보지 못하는 오류를 종종 일으키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신이 듣던 1950~1970년대 아날로그 시절 명연주, 명음반의 디지털 포맷들이 가진 오류들을 다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은 텍스트가 아니라 수사가 불가능한 영역의 신묘한 음악적 언어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플래너 1은 엔트리급이지만 LP라는 포맷의 매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 리마스터링의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해방되면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고 즐겼던 음악들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온다. 음악에 담긴 생생한 들숨과 날숨은 LP 포맷에 투과되어 더 진심어린 생명으로 부활하고 있다. 플래너 1은 가장 쉽게 아날로그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해주는 편도 티켓이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